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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팬아트페어 @스타필드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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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Isis
댓글 0건 조회 22회 작성일 25-05-1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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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원메칸더 삶아 안녕? 이제 나의 유년 시절로 돌아가 보려고 해..도와 줄수 있지? 기억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힘껏 기억해 보자^^​내 삶의 5살!내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한 시골 중에 시골이지버스도 하루 3번(아침, 점심, 저녁) 다니는 그런 시골이었고TV와 전화기는 초등학교 4학년때 처음 접할 정도로 깡촌이라고 불리었지​내 기억속 당시 우리집은 흑별돌집이 었던 것 같아..맞지? 부억이 있고, 안방, 사랑채가 있었던 것 같아!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난 우리 형제들과 엄마가 같은줄 20살까지 살아오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며 날 낳아 주신 어머니는 다른 분이란 것을 알게되었지.​5살부터 내 기억 중 가슴아픈건할아버지의 꽃가마(?) 보고 철없이 가지말라고 쫓아 갔던 기억이 나네..왜냐면 난 엄마가 없는데 기억도 없는데당시 난 할아버지가 사랑채에서 곰방대 담배를 피우시며 화롯불 위에 노란 냄비속에돌+감자를 물에 넣어 삶아 주었던게 제일 기억나! 제일 맛있었어동네 아주머니들이 늘 나에게 한 말이 아직도 머리에 맴돌아.. 20살될때 까지 그것이 진짜인줄도 모르고 안믿었지만...​바로! 넌 다리 밑에 주워왔다고 했던말.. ㅎㅎ 한번쯤 들어 봤지?난 너무 너무 싫었어...엄마 없는 나에겐 깊은 상처였거든...성인이 된 난 지금의 가족에게도 엄마는 나를 낳다 돌아가신 걸로 말했거든..물론 지금은 사실을 알고 계셔..난 5살때 부터 엄마 소리를 못해보고 그 수원메칸더 흔한유치원 입학식때 유일하게 엄마 없이 혼자 입학한 아이였던걸...그때 부터 나에게 어머니는 없었고, 이미 죽은 걸로 스스로 인식하고 살았던 것이지​부끄러운 이야기지만 5살때 소변을 참다가 바지에 소변을 봤는데 빨래 해줄 사람이 없어내가 빨래 방망이, 빨래 비누 들고 개울가에가서 혼자 빨래하고 널었던 것 같아.. ​7살이 된 나는 유치원 입학식날 20명 정도가 입학을 했던 것 같아..그중에 나는 키가 제일 작고, 얼굴 까맣고, 옷을 누군가 헌옷을 준 것을 입고 제일 좋은 것이라 하여 입고 입학식 갔던것 같아!​사진촬영할때? ㅎㅎ 나만 엄마가 없어서 유치원 선생님이 엄마 역할 해주셨어!!(사진은 나중에 찾으면 올릴 예정)​그때 부터 난 엄마없는 아이가 되었지만 기죽지 않았어..놀리는 형 누나들 앞에서 더 큰 목소리, 더 악쓰며 당당하게 살려고 몸부림 쳤던것 같아​특히 개울가 건너집에 이사온 친구는 강원도 사북에서 이사왔는데3남매더라구.. 그집에 부러웠어..하루 종일 혼자 놀다가 학교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그집에서는 굴뚝에서 연기가모락모락 나며, 3남매가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너무 부럽더라구..집에 가면 아버지는 일하고 항상 늦게 들어온 뒤 동네 어르신과 막걸리!형! 누나? ㅎㅎ 글쎄 형 누나들과의 기억은 초등학교 3~4학년 부터 기억이 있어.(지금은 없는, 당시 초딩시절 섶다리라고 해서 동네 어르신들이 만듦)​유치원때 그렇게 코만 흘리다 어느 덧 초등학교 수원메칸더 입학을 할때가 되었지..웃긴건...진짜 웃긴건...사실 슬픔이 이때 부터 시작이 된 것같아​8살에는..초등학교 시작이자나? 슬픔의 기어이 스르르르르........가방이 없는 거야..왜 나만 없지?ㅎㅎ 능력없는 부모탓을 했어야 하나?아니면..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기엔 너무 어린 나 아니었던가?지금 생각하면 노란색 보자기에 책을 싸매고 등교했었는데.. 난 친구들에게 놀림받고 펑펑 울었던 것 같아! ㅎㅎ 웃긴 기억이지만 당시엔메칸더 브이 그림이 그려진 책가방이 갖고 싶었단 말이지.그렇게 보자기를 매고 1학년을 보냈는데 누가 뭐라하든 난 그냥 당당히 살아가려고스스로에게 말했었나봐...지금 42살인 지금도 비가 오는 날 혼자 걸을때면 내 어릴적 서러워 빗속을 맨발로동네 한바퀴 걸었던게 생각나는 군...ㅜㅜ​그렇게 눈물의 1학년은 별로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싫었다아 참!! 나쁜 기억만 있는게 아니다. 그치??​우리집 소 2마리를 키웠었거든! 학교 다녀와 소 2마리 끌고 풀을 먹이러 강가로 가서풀뜯어 먹도록 30분정도 시간을 항상 갖었거든!! 10분거리에 조양강변 풀밭에 소를 풀어 놓고 나는 미루나무 밑 돌판위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잠을 잤던게 좋은 기억이 나네^^(이곳 강변에 가서 강바람 맞으며 혼자 시간을 보냈지)​아! 또 기억났다. 소쿠리에 옥수수 놓고 줄을 메단 후 참새 잡던 기억!겨울이면 철사를 토끼옹로로 만들어 산에가서 토끼잡던 기억!(시골에 살면서 딱 1마리 잡았음 ㅋㅋㅋ)​그렇게 1학년은 한글도 제대로 못쓰고 남들은 책받침 구구단을 외웠는데 난..2학년 가서 수원메칸더 매일 혼났던것 같아!(당시 파마머리 여자 담임선생님은 나만 혼냈음 ㅡ.ㅡ;;;)구구단 외운다고 한줄로 세워놓은면 난 항상 맨 뒷줄! 왜? 어차피 모르니까!ㅋㅋㅋㅋ(결국 선생님은 매일 나머지 공부 시켜주셨지 뭐...)(사진 참고 활용) 내가 5학년때 앉아서 공부한 실제 교실(화목난로 옆 맨 앞줄)지금 우리 자녀들은 대단한 것 같아 그치? 나의 7~8살과 비교해 보면 너무 빠르고똑똑한 것 같아!​시간이 한 참 지났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게 나의 어릴 적 시간과 너무 비교되면서보여지니 글을 쓰면서도 웃긴다^^*​1학년때 기억나는 아픔 중 아버지의 손 절단 사고였어!소 여물을 자른다고 카터기라는 기계에 풀을 넣다가 손가락 일부가 절단되어아버지는 그때부터 일상생활에 제한된 생활을 해 가셨어​엄마도 없지, 돈도없지, 가방도 없지, 친구도 없지, 집에 오면 먹을게 없지,그런데다가 아버지 손마저....세상에... 이제 진짜 빨래는 내가 다해드려야 하네?누나! 형! 들은 나와 나이차이로 이미 중학생이 된 때라 집에 안들어오니나 혼자일수 밖에....그때 알아 챘어야 하는데.. 난 형 누나들과 다른 배속에서 태어난자식이라는 걸....​사실 돌이켜 보면 형 누나들이 딱히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것은 없었던 같아기억나는 것 중 지인 분중 누군가의 결혼식에 갔는데형 누나들아 다 뭉쳐서 가는데 나만 아무도 챙겨주지 않고 알아서어르신들이 타고 온 버스 타고 외롭게 집으로 왔던 것 같아!​형들은 큰형 부터 누나 들은 이미 출가준비 수원메칸더 중이라 나랑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아마도 9살이라고 기억해보면 ....그렇게 1~2학년은 가방사건, 아버지 손가락 사고, 혼자 빨래 등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지금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나는 인생을 험난하게 헤쳐가야 할 지도 모른다는생각은 못한체 살았던것 같아!​형 누나들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바랬던 당시의 나의 기대는 높았다가 낮아지기를반복했었지...여름방학, 명절때 마다 내려오는 누나, 매형, 조카(나랑 나이가 3살차이) 들이 내려오면더 가슴을 아프게 했던것 같아..​서울, 의정부, 수원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전날 부터기대와 보고싶은 마음에 사랑채에서 어린 마음에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던것 같아이유는 단 하나! 용돈을 받고 싶었다.그래서 가방을 사고 싶었다. 양말도 사고 싶었다.​그러나 누나, 형들은 항상 새벽에 도착해서 아침에 일어나 인사하고각자 놀러가기 바빴고, 2일 후에는 다시 돌아갔으니..나랑은 정말 안맞았다..슬펐다.. 진짜 나는 누구였을까.. 형제가 맞는건지? 나이차이는 왜이렇게 많이 나지?내 엄마 사진은 어디있지? ㅎㅎ 한번도 못봤다는 사실...얼굴도 모르니 말이야..42살인 지금도 모르니..왜 모르고 알고 싶어하지 않았는지는 앞으로 써 나갈 예정이다.​그렇게 떠난 형제들은 나에게 눈물만 남기고 공허함으로 다시 나는 일상을 시작해야했지..먼지를 뿜으며 시골길을 내 달리던 봉고차 뒤면을 멀찍이 보면서나도 서울 가고싶다고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날 받아주지 않았다..싫었겠지... 부담되고... 나라도 그랬을거야..그치?​암튼 난 별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도돌이표처럼 또다시 생활해야 했고2학년이 될때까지 가방은 여전히 수원메칸더 못사고 책을 학교 교실 바닥에 놓고 다녔던 것 같아!​그러던 그해 여름방학 말미에 경희대학교 누나 형들이 시골 농촌일손돕기 한다고20명정도가 학교에 텐트치고 생활했던걸 기억나!그때 누나 형들이 나에게 준 2~3벌의 옷과, 가방, 그리고 연필세트, 축구공이 나의 첫 선물이었던 것이었다. 그 가방은 메이커는 아니었지만 검정색 단추가 달린 가방이었다.2학기 개학할때 난 자랑스럽게 매일 매고 다녔고, 주신 연필로 일기도 쓰고 공부도 시작했다. 매번 나머지 공부하던 난..그때부터 학교가 좋아졌던게 아닐까 싶다.ㅎㅎ 남들에겐 일상이지만 나에게는 받고 싶었던게 기적처럼 생겼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경희대학교 누나 형들 고맙습니다/ 34년이 지났지만 너무너무 감사합니다그렇게 난 초등학교 2학년 부터 혼자라는 사실을 이겨내기 위해스스로 놀감을 찾아다녔던것 같아! 혼자 있을 수 있는 나무와 나무사이에 나무를 엮어비밀 아지트 처럼 기지를 만들었었지^^* ㅋㅋㅋ사실 이곳이 나중에 할 얘기지만 4학년때 친구들과 딱지치기 하는 명소가 되었다는..또하나는 축구라는 운동을 접했다! 암튼 2학년때 부터 나는 축구와 외로움을 달래며 유일한 나의 시간을 찾게되었던 것 같다.비가 오나..눈이오나.. 운동장에서는 꿈이 축구선수도 아닌데 그냥 공차는게 즐거웠다.(지금은 덩그러니 아무도 없는 운동장)​지금 생각난 건데.. 축구화가 없어서 맨발로 차고 다녔다는..왜냐면 운동화는 바닥이 밑창이 공찰때 마다 덜렁거려서 오공 본드로 붙여서 신고다닌지라 가지고 있는 신발이라도 아껴신어야 했거든...생각해보니 축구화는 4학년때 수원메칸더 처음 내 돈으로 샀던것 같아^^돈이 없으니 몸으로 모든걸 해결했던 것 같아! ​이제 당시 겨울 이야기를 생각해 볼까?음.. 가장 떠오르는 건 눈이 엄청 많이 왔던것 같아! 한 내 키만큼!! 굴파고 다닐정도로!!​이런 시골에서 눈 오면 더 먹을 것이 없어지는데나는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ㅎㅎ 글쎄.. 기억이 잘 안난다..할아버지 감자밖에.. 그 돌감자가 나의 8~9살까지 이어진 듯 하다.​아버지는 늘 동네사람들과 술드시고 오시면 주무시는지라나하고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내가 뭘 하든 크게 관여하시지 않았다.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그냥 싫었다.​나에게 부모란...부모란... 음...일기장에는 혼자인게 싫다고 늘 썻던것 같다.집은 혼자였고, 학교에는 다른 곳에 사는 친구들끼리 놀고,난 축구를 하며 혼자 이겨내는 생활이었으니.. 내 어린 시절의 시작은 너무나 가엾다.가을 날이면 추석에 가끔씩 찾아뵙는 건너집 큰할머니 댁에 가면항상 우리 진호(내가명) 엄마를 찾아야 하는데.. 어디서 쳐 안죽고 살고 있나..나쁜년!엄마 안보고 싶나?라고 매번 얘기하셔서 어쩌면 그때부터 내 엄마에 대한 부정은시작된 듯 하다.(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가서 더 자세히 써보겠음)​아니.. 지금 생각하면 내가 모르는 과거와 사실은 유일하게 큰할머니는 알고 계신걸아버지는 살아생전 나한테 단 한마디도 없으셨던 것이다.그러나 나는 느낌으로 알게 된 것이다. (훗날 결혼 후 가족이랑 인사하러 갔을때 아내도 살짝 눈치 채게 되는 계기가 되었음)엄마없다는 현실이 수원메칸더 엄마라고 불러보지 못한 내입술과 내 마음은 알기라도 하는지.속으로 몇번을 찾았는데.....나쁜 나쁜...에잇....​10남매 중 막내지만 사실은 혼자인 것이다. 엄마가 다르고 당시도 혼자였으니 말이다.가끔씩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너무 싫었다.날 왜 낳으셔서 이렇게 힘들게 어린시절을 보내게 했는지 말이다.​대화도 없고, 술만 드시니 좋을리가 없었다.그렇게 1~2학년은 뭣 모르고 늘 배고픔에 지쳐 살아가고 추위에 버티고 버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이제 겨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음... 토끼옹로 설치, 강 얼음낚시, 나무스케이트 만들어 탔던 기억이 난다.앞서 말했지만 토끼옹로 설치해서 토끼를 잡은 건 딱 1마리 뿐이다. 늘 비켜가거나접근조차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강은 꽁꽁 얼면 그물에 걸린 고기를 보고 얼을 깨어 궤리라는 물고기를 5~6마리 가져와화롯불에서 구워먹었던것 같다.나무스케이트는 잘 만들지 못했지만, 이웃진 형들이 만든것을 보고 혼자 만들어서타고 다녔던 것이다. 어느날 강얼음이 깨져서 자칫 목숨을 달리 할 뻔도 했다는ㄷㄷㄷㄷㄷ겨울이면 이곳에서 얼음낚시를 했었답니다.​지금까지 1~2학년때 생각나는 걸 적어 봤는데..음...뭐랄까지금 생각해보니 세상에 태어나 고생을 너무 일찍 시작했나 싶다.부모가 원망스럽고, 형제들이 싫고, 혼자인 나도 싫었으니.....​근데.. 앞으로 써내려갈 이후 삶들은 더 혹독했다는 기억속 장면을 떠올리며다음 3편에서 다시 나의 파스텔 같은 삶을 다시 적어보려 한다...​고맙다 나의 8~9살 인생아! 지금의 단단한 나를 만들어준 시간들.. 네 덕분이란걸 말이지..​​다음편에서 또보자! 내 기억아!^^​

수원메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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